[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반도의 최북단 지역인 함경북도 온성군의 작은 농촌 마을.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모래먼지가 일고, 논두렁 사이로 흙냄새가 짙게 퍼지던 그곳이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미래간호인재 교육연구단 김옥심 박사의 고향이다.
지금은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는 학자지만, 그의 출발점은 농촌의 굽은 길이었다. 할머니의 고향이 만주라는 이유로 가족은 '출신성분'이란 굴레에 갇혀 농촌에 묶였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는 꿈을 접는 대신, "내 자식만큼은 꼭 공부를 시키겠다"는 한 가지 소망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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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이탈주민 어머니의 트라우마가 청소년 자녀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옥심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미래간호인재 교육연구단 연구원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2.14 yjlee@newspim.com |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 굶주림으로 텅 빈 학교에서도 어머니는 자녀의 손을 잡고 학교로 보냈다. "자식들만큼은 호미를 들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린 김옥심에게 평생의 북극성이 됐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 속에서 공부로 삶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어머니는 탈북을 결심했다.
가족은 고등중학교 5학년을 마친 김 박사와 함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잠시의 평화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의 신고로 북송됐고,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보위부의 심문대에 서야 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그는 그때의 공포를 '기적 같은 생존'으로 기억한다. 이후 가족은 다시 탈출했고, 생명을 건 한국행이 시작됐다. 김 박사가 먼저 입국했고, 7개월 후 어머니와 남동생도 합류했다.
한국에 정착한 그는 오직 공부로 새 삶을 열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뒤 대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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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 |
그때 다니던 교회에서 해외 의료봉사단이 꾸려졌고, 그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의료 지식이 없어 아이들과 노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 현장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그날을 계기로 그는 '나도 의료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인생을 바꿔놓았다. 탈북민 특별전형으로 연세대 간호대학에 입학한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C학점을 받아도 괜찮아요. 실습 나가면 다시 배울 수 있어요."
선배의 말은 그를 떠받친 버팀목이 됐다. 결국 휴학이나 중퇴 없이 학업을 마치고, 대학병원과 준종합병원에서 7년간 간호사로 근무했다.
임상 현장에서 사회사업팀과 협력하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환자가 지역사회의 지원과 병원 제도를 통해 치료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에도 이런 제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후 김 박사는 고려대학교 통일보건의학 협동과정 석사 1호생으로 입학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연세대 추상희 교수 연구팀에 합류해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과 트라우마 연구를 진행했다.
"트라우마가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얼마나 오래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지도교수의 제안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학비 부담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교수의 전폭적 지원 속에 '북한이탈주민 어머니의 트라우마가 청소년 자녀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4년간 연구를 이어갔다. 그 결과 그는 탈북민 1호 간호학 박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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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홍콩에서 열린 제15회 국제 간호 포럼에 초청돼 젊은 연구자 세션에서 발표를 하는 김옥심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미래간호인재 교육연구단 연구원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2.14 yjlee@newspim.com |
"탈북민 학생을 끝까지 믿고 밀어준 교수님의 결단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김 박사는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간호대학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간호사가 의료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환자에게 가장 가까운 의료인이 바로 간호사라는 생각에서다. 간호 인력이 변해야 북한의 보건의료가 변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최근 그는 홍콩에서 열린 제15회 국제 간호 포럼에 초청돼 젊은 연구자 세션에서 발표를 맡았다. 북한 농촌의 한 소녀가 죽음을 무릅쓴 탈북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박사가 되고, 세계의 학술 무대에 올랐다.
김옥심 박사는 오늘도 연구실에서 통일 이후 북한의 간호 인력을 양성할 미래를 그린다. 어쩌면 그가 꿈꾸는 그날은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