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 푸른 바다와 노을이 어우러진 시드니 본다이비치에서 연말 축제의 즐거움이 순식간에 공포로 뒤바뀌었다.
14일 해질녘 해변가를 따라 마련된 유대인 하누카 축제장은 아이들의 웃음과 사람들의 환호로 가득 찼지만, 갑작스러운 총성과 비명 속에 해변은 순식간에 피로 물든 전쟁터가 됐다.
이날 총기난사로 15일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16명(어린이 1명 포함)이고, 40명의 부상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어린이 부상자를 포함해 일부는 위독한 상태여서 사망자가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크리스 민스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총리는 "이번 공격은 시드니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해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이라고 밝혔다. NSW 경찰 역시 이번 사건을 공식적으로 테러 사건으로 규정했다고 확인했다.
이번 사건은 호주 내 총기 규제, 인종·종교 혐오 범죄, 연말 안전 문제 등 사회적 논의를 촉발할 전망이다. 교민사회와 관광객 모두 충격과 불안을 안은 채, 경찰과 정부의 후속 조치와 안전 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불꽃놀이인 줄 알았다" – 첫 총성의 순간
이날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본다이비치 일대는 하누카 첫날을 맞은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누카 바이 더 씨' 행사장에서는 노래와 기도, 아이들 공연이 이어졌고, 해변과 잔디밭에는 1000명 넘는 인파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때 해변과 공원을 잇는 작은 보행자 다리 쪽에서 "팝, 팝, 팝"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처음엔 불꽃놀이쯤으로 여긴 이들도 있었지만, 곧 사람들 머리 위로 흙과 잔디가 튀고,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면서 상황은 곧바로 공포로 바뀌었다.
한 목격자는 "다리 위에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서서 행사장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쪽만 겨냥하는 게 분명히 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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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시드니 본다이비치에서 유대교 명절 행사 도중 발생한 총격 사건 현장 인근 해변에, 대피 과정에서 사람들이 두고 간 소지품들이 모여 있다.[사진=로이터 뉴스핌] |
◆ 9분 동안 이어진 지옥같은 시간
첫 신고가 접수된 건 오후 6시 47분경. "본다이에 총을 든 남자가 있다"는 신고가 잇따라 접수됐고, NSW 경찰은 10분도 안 돼 '현장 접근 금지' 경고를 내렸다.
다리 위의 두 남자는 잔디밭과 놀이터, 행사장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려가며 조준 사격을 이어갔다.
한 목격자는 "사람들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가는 총알 소리가 들렸다"면서 "10분 가까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행사에 왔던 한 아버지는 "사람들이 가방과 유모차, 휴대전화까지 다 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어떤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안고 뛰고 있었다"고 전했다.
해변 모래사장 곳곳에는 엎드린 사람들, 차량 뒤에 몸을 숨긴 사람들, 쓰러진 이들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이들이 뒤엉켰다.
◆ 맨몸으로 총잡이를 제압한 '본다이의 영웅'
총성이 이어지던 중간, 다리 아래쪽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주차된 차들 사이로 맨몸의 남성 한 명이 총구를 향해 몸을 낮춘 채 빠르게 접근한 뒤, 재빠르게 용의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인근에서 과일 가게를 운영하는 43세 아흐메드 알 아흐메드로, 행사장을 지나가던 길에 총격을 목격하고 맨몸으로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 영상과 목격자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차량 뒤에 몸을 숨기며 총잡이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타이밍을 보아 뒤에서 달려들어 몸으로 들이받고 넘어뜨렸다.
총을 재빨리 빼앗은 아흐메드는 총을 안전한 곳에 던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저쪽으로 숨으라"고 소리치며 다른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최소 두 발에 맞아 팔과 어깨, 다리 등에 총상을 입었지만, 의식을 잃지 않고 계속 주변을 돕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고, 가족과 친척들은 "그는 진짜 영웅"이라며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NSW 주지사 크리스 민스는 "총을 쏜 범인에게 걸어 올라가 단독으로 무장해제한 믿기 힘든 장면"이라며 "많은 사람이 그 용기 덕분에 살아 있다. 진짜 영웅"이라고 말했다.
호주 언론과 SNS에서는 '본다이의 영웅', '올해의 호주인 감'이라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고, 그의 가게를 찾아가서라도 매출을 올려주자는 움직임까지 등장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도 "많은 호주인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면서 "그들의 용감함이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했다.
◆ 테러 표적은 유대인 커뮤니티
'하누카 바이 더 씨'는 매년 본다이비치 인근에서 열리는 유대교 하누카 기념 행사로, 유대인 가족과 어린이 중심의 지역 축제다. 라이브 공연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 프로그램이 어우러진 이 행사는 시드니의 연말 풍경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테러는 이 축제를 유대인 커뮤니티를 겨냥한 표적으로 삼았다.
현지 유대인 단체는 "이번 공격은 단순한 총기난사가 아니라, 유대인을 향한 증오와 혐오의 폭력"이라며 분노를 드러냈다.
한 유대인 커뮤니티 관계자는 "하누카는 '기적'과 '자유'를 기리는 축제다. 그런데 그 첫날, 우리 가족과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이건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테러"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최근 호주 내 팔레스타인·가자전 관련 시위가 고조된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올해 들어 시드니, 멜버른 등 호주 주요 도시에서는 가자전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대규모 시위가 반복됐고, 수만 명이 도심을 가득 메우는 집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특히 본다이비치는 시위와 반대 집회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지난 9월, 본다이비치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친이스라엘 시위대가 충돌하며 경찰이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로도 유대인 커뮤니티는 "반유대주의 구호와 위협이 늘어났다"고 호소해 왔다.
현지 유대인 단체는 이번 테러를 "그동안 누적된 반유대주의 정서가 결국 폭력으로 터져 나온 결과"라고 분석한다.
이번 사건은 지난 2014년 12월 15일 시드니 도심 마틴플레이스의 린트 초콜릿 카페에서 단독 범인이 18명을 인질로 잡았던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정확히 11년 만에 일어났다. 당시 16시간 넘는 경찰과의 대치 끝에 인질 2명과 범인이 사망했는데, 해당 사건은 이슬람 극단주의 연계 인질 사건으로, 호주 내 테러 대응과 공공 안전 정책에 중대한 전환점을 남겼다.
한 관계자는 린트까페 테러 이후 호주 사회에는 '증오를 증오로 갚지 말자'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지만, 최근 몇 달 사이 분위기가 달라졌다면서, 이번엔 '증오'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교민사회 "연말인데 뒤숭숭"
현지 교민사회는 충격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교민은 "인종차별이 심해질까 걱정된다. 경기 불황 속에 12월 크리스마스 특수를 기다리던 상인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민은 "혐오범죄 테러라 마음이 무겁다"면서 "연말인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는 게 꺼려진다"고 말했다.
본다이비치 인근 상권은 연말 관광객과 시드니 시민들로 붐비는 시즌을 기다려왔는데, 이번 사건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질까 우려하는 보습이다.
한 유럽 관광객은 "미국도 아니고 호주에서 총기 테러라니, 믿기지 않는다. 관광지 방문이 무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시드니 경찰은 본다이비치와 인근 도로를 폐쇄하고 사건 현장 조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시민들은 경찰 안내에 따라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사건 경위를 주시하고 있다.
현지 교민사회와 상인들은 "이번 테러가 호주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증오와 공포가 아니라 연대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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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쇄된 본다이비치에 경찰들이 경계 근무 중이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kwonjiu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