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정인 기자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4박5일간의 방한 일정을 통해 한국 인공지능(AI) 산업 전반을 엔비디아 생태계와 연결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삼성전자와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파운드리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SK하이닉스와는 HBM 장기 공급 파트너십을 강화했다. LG·현대차·네이버·두산과는 AI 팩토리·로보틱스·자율주행·데이터센터 분야 협력 가능성을 넓혔다. 방한 전 언급했던 '짧은 휴가'와 달리 실제 일정은 한국을 AI 반도체 공급망과 피지컬 AI 확산의 전략 거점으로 삼기 위한 강행군에 가까웠다.
◆ "한국과 미래 건설"…협력 확대 재확인
황 CEO는 9일 오전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에서 출국 전 취재진과 만나 "한국과 함께 미래를 건설할 수 있어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파트너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고 사업이 번창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공급이 필요하다"며 "매우 좋은 회의를 했고 좋은 파트너십도 발표했다"고 밝혔다.
황 CEO는 이번 방한의 주요 성과로 SK하이닉스와의 협력 확대를 꼽았다. 그는 "SK하이닉스와 다년간 파트너십을 체결해 사업을 확장하고 협력 관계를 더욱 다각화하기로 했다"며 "서로에게 매우 좋은 윈윈 계약을 발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네이버, SK텔레콤과 각각 AI 슈퍼컴퓨터 및 AI 클라우드 관련 협력도 발표했다"며 "앞으로 모두 매우 바빠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이 엔비디아 사업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AI 산업 생태계 구축을 언급했다. 황 CEO는 "엔비디아의 가장 큰 기여는 AI 산업을 만들고 AI 생태계를 조성한 것"이라며 "AI 슈퍼컴퓨터는 한국의 기술 없이는 구축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는 로보틱스와 AI 인프라 분야에서 큰 기회가 있다"며 "한국 기업들과 협력해 해외 시장까지 사업을 확대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 총수 회동으로 드러난 한국 공들이기
황 CEO의 이번 방한은 공식 협력 발표와 비공식 소통이 맞물린 일정이었다. 그는 방한 기간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 부회장 등 국내 주요 기업 인사들과 잇달아 만났다.
현장 행보도 눈에 띄었다. 황 CEO는 국내 주요 인사들과 식사 자리를 갖고, 야구장 시구와 방송 출연 등 대중적 일정도 소화했다. 업계에서는 황 CEO가 공식 회의와 공개 행보를 병행하며 엔비디아가 한국 시장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 CEO가 각 기업을 잇달아 찾고 총수급 인사들과 직접 만난 것은 한국을 단순한 부품 조달처가 아니라 엔비디아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군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HBM 공급망을 책임질 메모리 기업, AI 인프라를 구축할 통신·인터넷 기업, 피지컬 AI를 구현할 자동차·로봇·제조 기업을 한꺼번에 묶어낸 셈이다.
◆ HBM 양강과 공급망 재점검
황 CEO가 출국 직전 언급한 '더 많은 공급'의 출발점은 메모리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AI 가속기 플랫폼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HBM 수요는 계속 커지고 있다. AI 서버 한 대에 탑재되는 HBM 용량이 늘고, 차세대 제품으로 갈수록 전력 효율과 대역폭 요구 수준도 높아지는 만큼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망 확보는 엔비디아의 핵심 과제가 됐다.
SK하이닉스와의 협력 확대는 이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SK하이닉스는 이번 방한 기간 엔비디아와 2년 이상의 메모리 장기공급계약(LTA)을 체결했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AI 플랫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핵심 HBM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묶어둔 셈이다. 황 CEO가 최태원 회장과 만나 HBM 생산능력 확대 필요성을 언급한 것도 장기 공급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삼성전자와의 협력은 메모리 공급 다변화와 파운드리 협력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삼성전자는 HBM4와 HBM5 등 차세대 메모리뿐 아니라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역량을 함께 갖춘 기업이다. 황 CEO는 방한 기간 전영현 부회장 등 삼성전자 반도체 경영진과 만나 HBM과 파운드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통해 메모리 공급망을 넓히는 동시에 맞춤형 반도체 생산 역량까지 확보할 수 있다. SK하이닉스가 HBM 공급망의 현재 핵심 축이라면, 삼성전자는 차세대 HBM과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중장기 전략 파트너로 의미가 있다.
◆ AI 팩토리로 넓어진 한국 파트너십
이번 방한은 엔비디아가 더 이상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줬다. 황 CEO가 세계 주요 행사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키워드는 AI 팩토리와 AI 인프라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는 데이터센터를 'AI 토큰'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보고, GPU와 네트워크, 저장장치,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네이버와 SK텔레콤은 이 전략의 대표적인 국내 파트너다. 황 CEO는 출국 메시지에서 네이버와 SK텔레콤을 직접 언급하며 AI 슈퍼컴퓨터와 AI 클라우드 협력을 강조했다. 네이버는 초거대 AI와 데이터센터 운영 경험을 갖췄고, SK텔레콤은 통신망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기반으로 기업용 AI 서비스 확장에 나서고 있다.
LG와의 접점도 AI 인프라 측면에서 넓어지고 있다. LG그룹은 AI 데이터센터, 로봇, 전장 부품, 배터리, 전력 솔루션 등 엔비디아의 피지컬 AI 전략과 맞물리는 사업군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한국을 단순 GPU 판매 시장이 아니라 AI 인프라 구축과 운영 경험을 함께 쌓을 수 있는 전략 시장으로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 로봇·자율주행까지 번진 피지컬 AI 동맹
이번 방한의 또 다른 축은 피지컬 AI다. 피지컬 AI는 AI가 데이터센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로봇, 자동차, 공장, 물류센터 등 실제 산업 현장에서 작동하는 단계로 확장되는 개념이다.
현대차그룹과의 협력 가능성은 로보틱스와 자율주행 분야에서 주목된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제조 역량뿐 아니라 보스턴다이내믹스를 통한 로봇 기술,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모빌리티와 로봇을 동시에 검증할 수 있는 대형 파트너다.
두산과의 접점도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의미가 있다. 두산은 협동로봇과 산업용 로봇 사업을 키우고 있고, 두산에너빌리티를 통해 전력 인프라와 발전 설비 분야에서도 강점을 갖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로봇과 전력 인프라를 모두 보유한 두산과의 협력은 엔비디아 생태계 확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한국 시장에 공들이는 엔비디아
이번 방한은 엔비디아가 한국을 단순한 반도체 공급 기지가 아닌 AI 산업 전반의 전략 거점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줬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등 공급망 협력부터 AI 데이터센터,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까지 협력 범위가 확대되면서 한국 기업들과의 연결 고리도 한층 촘촘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과제도 남아 있다. 국내 AI 산업이 엔비디아 생태계에 깊이 편입될수록 GPU와 소프트웨어 플랫폼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 AI 인프라 구축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국내 AI 반도체,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응용 서비스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kji01@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