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풍요의 시대가 저물고 자금쟁탈의 시대가 도래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던 주체들의 돈줄기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가늘어지고 있다. 그 반대편에선 천문학적 부채를 안고 있는 주요국 정부들의 재정 차입 수요와 인공지능(AI) 기술혁명의 물결에 올라타려는 기업들의 투자 붐으로, 민·관의 자금조달이 봇물을 이룬다. 인플레이션 유령을 떨치지 못한 중앙은행들은 참전을 꺼리고 있다.
다음 ①~⑤편에서는 '과잉저축 시대'의 종언과 '대(大)차입 시대로 전환'을 불러온 동인과 이것이 자산시장에 갖는 함의를 짚어본다. ⑥~⑨편은 미래 매출과 수익을 담보로 자금 각축전을 벌이는 AI업계의 최근 동향과 이들의 자금폭식이 초래할 금융측면의 위험, 그 위험 너머의 기회를 살피기로 한다.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미국이 국채를 찍으면 누군가는 샀다. 재정 적자가 커져도 시장은 버텼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달러를 가장 꾸준히 받아준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그 역할에서 멀어진 지는 오래다. 러시아는 지정학적 갈등 속에 시장에서 사실상 이탈했다. 이제 시장이 주목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조달러가 넘는 미국 국채를 보유한 세계 최대 해외 채권국이다. 30년 동안 미국 국채시장을 떠받친 가장 조용한 자금줄이었던 일본이 이제는 자국으로 돈을 돌려보낼 유인을 갖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AI) 투자와 재정적자 확대로 돈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미국과, 돈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일본이 맞물리면서 '대차입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미국의 가장 조용한 후원자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금리의 나라가 됐다. 일본은행(BOJ)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를 수십 년간 이어갔다. 시중에는 돈이 넘쳤지만 국내에서는 투자처를 찾기 어려웠다.
그 돈은 자연스럽게 해외로 향했다. 생명보험사와 연기금, 메가뱅크들은 미국 국채와 회사채를 사들였고, 엔화를 빌려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기본 구조가 됐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상적인 구조였다. 막대한 국채를 발행해도 일본의 기관투자자들이 꾸준히 사줬고, 미국 기업들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미국이 달러를 공급했다면, 일본은 그 달러를 흡수하는 가장 안정적인 투자자였다.
◆ 바뀌는 일본의 계산법
그런데 최근 일본 금융시장의 계산이 달라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일본 국채(JGB)의 금리다. BOJ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하고 정책금리 정상화에 나서면서 장기금리가 수십 년 만의 높은 수준으로 올라왔다.
예전에는 일본 국채를 사느니 미국 국채를 사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 국채에 투자하려면 환위험을 헤지해야 하는데, 달러 헤지 비용이 크게 오른 탓에 헤지 후 수익률이 일본 국채보다 낮아지는 구간이 생기고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굳이 환위험까지 떠안으며 미국 채권을 사야 할 이유가 약해지는 셈이다.
실제로 미국 국채의 큰손인 일본의 주요 생명보험사들은 해외채권 투자 전략을 재조정하거나 국내채권 투자 확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 변화는 아직 대규모 매도로 이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30년 동안 해외로 향하던 돈이 이제는 국내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 엔저 방어가 만든 역류 압력
여기에 엔저 문제가 겹친다. 엔화 약세가 심해질수록 일본 정부와 BOJ는 환율 안정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는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금리를 더 올리는 것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 ▲해외자산을 활용해 달러를 조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환개입을 미국 국채 대량 매각으로 이해하지만 현실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일본은 '외국통화당국 대상 레포(FIMA 레포)' 제도를 통해 미국 국채를 담보로 달러를 조달할 수도 있다. 반드시 국채를 대거 팔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장이 긴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일본이 앞으로 미국 국채를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앞으로 얼마나 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국채시장은 신규 수요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장기금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 월가가 보는 것은 '매도'가 아니라 '수요의 공백'
지금 미국은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자금 수요를 동시에 맞고 있다. 코로나 이후 재정적자는 상시화됐고,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투자에는 수조 달러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다.
민간기업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회사채를 발행해 자사주를 사들이는 시대에서 공장과 반도체, 전력설비에 투자하는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돈을 빌리려는 주체가 정부와 기업 모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을 공급하던 나라들이 하나둘 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미국 국채 비중을 꾸준히 줄여왔다. 러시아는 시장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일본은 국내 회귀 압력이 커지고 있다. 다음 차례는 중동이다. 지정학적 긴장이 커질수록 오일머니 역시 예전처럼 미국 금융시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지고 있다.
◆ 과잉저축의 시대는 끝나고 있다
한때 세계는 과잉저축을 걱정했다. 중국은 흑자를 쌓았고, 일본은 저금리 속에서 해외에 투자했고, 산유국은 오일머니를 미국 금융시장에 흘려보냈다. 그 돈은 미국 국채를 사고, 기업채를 사고, 자산가격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 돈을 빌리려는 곳은 늘고, 돈을 내주던 곳은 줄어든다.
일본의 변화는 그 전환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미국을 떠받친 1조달러의 돈줄이 하루아침에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돈이 더 이상 당연히 미국으로 향하지 않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월가가 금리의 미래를 다시 계산하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goldendo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