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 미국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누려온 '안전자산' 지위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 중앙은행들이 뉴욕에 보관해 온 금을 옮기는 가운데,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국부펀드도 미국 국채 비중 축소를 제안했다.
7일(현지시간) 마켓워치 등에 따르면 네덜란드 중앙은행(DNB)은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뉴욕과 캐나다 오타와에 보관하던 금 86톤을 런던으로 재배치했다. 이에 따라 런던 보관 비중은 18.1%에서 32.1%로 늘고, 뉴욕과 오타와 비중은 각각 18.5%로 조정됐다.
DNB는 총 612.4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 조치를 지정학적 불안에 대비해 금의 유동성과 거래 가능성을 높이고 위기 대응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런던은 세계적인 실물 금 거래 중심지인 만큼, 뉴욕이나 오타와에 보관된 금보다 위기 상황에서 보다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번 재배치는 금을 단순히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식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일부 물량은 뉴욕에서 매각한 뒤 런던에서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전됐으며, 27톤 이상은 북미에서 네덜란드의 금고를 거쳐 런던으로 물리적으로 이동했다. DNB는 대규모 금괴를 한꺼번에 운송하는 데 따른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매매와 실물 이동을 병행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도 최근 뉴욕에 보관하던 금을 전량 매각한 뒤 등급을 높여 재매입하는 방식으로 약 150억달러(약 20조원)의 차익을 냈다. 독일은 트럼프 1기 때부터 일부 금을 자국으로 옮겨왔지만 상당량은 여전히 뉴욕에 남아 있다.
글로벌데이터 TS롬바드의 스티븐 블리츠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비합리성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며 "그(트럼프)가 갑자기 뉴욕에 있는 이 금을 반출하지 못하게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그 가능성이 낮다면서도 "네덜란드가 금을 옮기는 게 신중한 선택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백악관 관계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이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금을 예치하게 만든 미국의 리더십이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굳건하다고 반박했다.
아메리칸 하트퍼드 골드의 맥스 배커 회장은 "이는 지리보다 통제권의 문제로 보인다"며 "중앙은행들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의 금에 신속히 접근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고 진단했다.
◆ 노르웨이 국부펀드, 美국채 줄이고 美 비정부채권 늘린다
세계 최대 규모(2조3000억달러)인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운용기관 노르웨이중앙은행 투자관리부문(NBIM)은 정부채권이 채권 벤치마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기존 70%에서 50%로 낮추는 방안을 지난 1일 재무부에 제안했다.
이에 따라 채권 벤치마크 내 미국 국채 비중은 34.1%에서 21.9%로 낮아지고, 현재 약 2150억달러(약 28조8천억원)인 미국 국채 보유액은 약 800억달러(약 10조7천억원) 줄어들 수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다만 아직 확정된 매각이 아니라 제안 단계이며, 실제 조정이 이뤄지더라도 시장 충격과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점진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주목할 점은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미국 자산 자체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NBIM은 미국 국채 비중을 줄이는 대신 미국의 비정부채권과 모기지담보부증권(MBS) 등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전체 채권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달러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52.9%에서 52.5%로 소폭 낮아지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즉 미국 국채에 대한 의존도는 낮추되,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전체적인 익스포저는 상당 부분 유지하는 구조다.
NBIM은 이번 조정의 배경으로 정부부채와 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장기 국채 시장의 압박이 커진 점을 들면서, 비정부채권을 확대해 분산 효과와 위험 프리미엄을 확보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미국 국가부채는 올여름 40조달러(약 5경 3846조원)를 넘어섰고, 인플레이션 우려와 중동발 유가 상승이 겹치며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지난 3월 4%대에서 9월 4.8%대까지 올랐다. 외국인 투자자의 미국 국채 보유 비중도 2008년 56%대에서 지난해 31%대로 낮아진 상태다.
◆ "그래도 가장 깊고 유동적인 시장"…美 국채 대체재는 아직 없어
미국 국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미국 국채를 단기간에 대체할 만한 자산은 찾기 어렵다는 반론도 나온다.
플랜테 모란 인베스트먼트 어드바이저스의 짐 베어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미국 국채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깊고 유동적인 시장이 또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없다는 것"이라며 "국채는 여전히 '나쁜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채 시장은 세계 최대 규모인 데다 거래량과 유동성이 압도적이어서 글로벌 투자자들이 대규모 자금을 빠르게 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장으로 꼽힌다. 따라서 일부 중앙은행이나 국부펀드가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고 해서 미국 국채의 안전자산 지위가 당장 흔들린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다만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움직임이 일회성에 그칠지 여부다.
하이타워 어드바이저스의 스테퍼니 링 최고투자전략가는 "10년물 금리가 5%를 돌파해 1~2주 이상 유지되는지를 지켜볼 것"이라며 이 지점이 시장 신뢰의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이펙스 핀테크 솔루션스의 마이크 트레이시 리스크 담당 부사장은 장기 금리가 높아질수록 금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지금 사실이라고 보이는 것들이 2년 뒤는커녕 두 달 뒤에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지정학적 환경은 순환적"이라고 말했다.
kwonjiu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