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용석 기자 = 2024년 5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의 국빈 방한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이 잇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이날 환담에는 하이브 방시혁 의장,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등도 자리했다. 그리고 무탠다드(무신사 스탠다드) 수트와 넥타이 차림의 조만호(43) 무신사 총괄대표도 있었다. 국내 패션·이커머스 플랫폼 기업 중에서는 무신사가 유일하게 초청받은 자리였다.
이날 조만호 대표는 고민을 하나 안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무신사 스탠다드는 옷에 브랜드 로고를 넣지 않는 이른바 '로고리스' 전략을 앞세운 브랜드다 보니, 정작 매장에 브랜드가 드러나는 쇼핑백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삼성, SK, CJ 같은 대기업 총수들 옆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플랫폼 스타트업 대표라는 위치를 의식한 조 대표는 인근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들러 쇼핑백을 챙겨 행사장에 들어섰다. 조 대표가 기지를 발휘해 떠올린 '브랜드 마케팅' 전략이다.
이 장면은 그로부터 약 20여 년 전, 고등학교 3학년이던 조 대표가 나이키 한정판 스니커즈 사진과 정보를 나누기 위해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2001년 인터넷 커뮤니티 '프리챌'에 개설된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은 판매나 수익을 염두에 둔 사업이 아니라 순수한 취미 공간이었다. 서버 운영비가 부족해지자 조만호 대표는 등록금 목적으로 모아둔 비상금을 털어넣고, 아끼던 스니커즈까지 중고로 팔아 커뮤니티를 유지했다는 일화는 훗날 당시 거래 상대방의 인증 글을 통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커뮤니티 이름이 줄어 '무신사(MUSINSA)'가 됐다. 2003년 독립 웹사이트로 분리되고 2005년에는 웹 매거진 '무신사 매거진'이 만들어지면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착장 사진과 브랜드 리뷰를 쌓아 올리는 '스트리트 패션의 백과사전'으로 진화했다. 이 시기 무신사 매거진은 국내외 브랜드의 신제품을 소개하는 일종의 홍보대행 역할도 맡았는데, 2010년대 초반에는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의 신제품이 소개된 적도 있었다. 2009년에는 입점 브랜드와 제휴해 직접 상품을 파는 편집숍 '무신사 스토어'를 열며 본격적인 커머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스토어를 만든 배경에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비용 문제로 백화점 등 오프라인 유통에 입점하지 못해 사업을 접는 사례가 많았던 데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온라인 패션 구매에 대한 소비자 불신을 정품 신뢰로 극복하겠다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었다.
무신사의 성장과 함께 10~20대를 중심으로 디자이너 브랜드가 가파르게 성장했다. 젊은 고객의 방문을 확대하고 싶은 오프라인 유통사의 니즈가 맞아떨어지며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오프라인 진출이 가속화됐다. 실제로 최근 국내 3대 백화점 그룹에서 전략적으로 'MZ세대'를 타깃으로 신규 입점시키는 패션 브랜드의 대부분이 기존에 무신사에 입점하면서 유명세를 탄 곳들이다.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다 보니 단국대 패션디자인학과 졸업까지는 10년이 걸렸다. 2012년 졸업과 함께 운영법인 '(주)그랩'을 설립했고 2018년 4월 대표이사에 올랐다. 이듬해 회사명을 무신사로 바꾸며 사명과 서비스명을 일치시켰다. 무신사 스토어 거래액은 2013년 100억 원에서 7년 만에 120배로 불어나 2020년 1조 2000억 원을 기록하며 국내 패션 플랫폼의 유니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조 대표는 2021년 특정 고객 대상 쿠폰 발행과 이벤트 이미지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는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무신사 운영의 최종 책임자로서 결자해지를 위해 책임을 지고 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후 개인 지분 일부를 순차적으로 매각해 확보한 약 500억 원을 신생 브랜드 초기 투자를 위한 패션펀드에 출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조 대표가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 있던 3년간은 2018년 합류한 한문일 대표가 대규모 투자 유치와 신사업 발굴을 이끌었고, 2021년부터는 구글·아마존을 거친 박준모 대표가 29CM를 맡아 별도 성장을 이끌었다.
2024년 3월 총괄 대표로 경영에 복귀한 조 대표의 첫 행보는 나이키의 무신사 입점이었다. 2001년 나이키 스니커즈를 좋아하던 고등학생이 만든 커뮤니티에, 20여 년 만에 나이키 본사가 직접 입점하며 관계가 뒤바뀐 셈이다. 복귀 첫해인 2024년 무신사는 연간 매출 1조 원을 처음 넘어섰고 영업이익도 흑자로 전환했다.
경영 체제는 지난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무신사는 지난해 12월 재무·법무·홍보·인사 등 사업지원을 총괄할 신임 대표로 조남성 대표를 선임하고, 올해 1월부터 사업 부문과 사업지원 부문을 나눈 2인 각자 대표 체제와 함께 C레벨 책임 경영제를 도입했다. 이때 신설된 직책 목록이 흥미롭다. 커머스·브랜드·글로벌·기술을 담당하는 CCO, CBO, CGO, CTO가 새로 생겼고, 조만호 대표 본인은 CEO이면서 동시에 CDeO, 즉 '최고 디테일 책임자'라는 직책을 겸임하기로 한 것이다.
각 사업 영역의 유기적 결합을 조율하는 역할인데, 유통업계에서는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유통까지 직접 겪어 본 조 대표 특유의 감각을 조직 안에 공식적으로 새겨 넣은 사례로 보고 있다. 실제로 조 대표는 경영학이나 마케팅을 공부한 다른 이커머스 플랫폼 창업자들과 달리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실무형' 리더로 꼽힌다. 무신사 안팎에서는 그를 '만호 형'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친숙한 이미지도 자리 잡았다.
현재 조 대표는 무신사 지분 52%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판매는 덤이고 먼저 공감부터 얻자'던 창업 초기 철학은 지금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무신사 스탠다드의 오프라인 매장 확대, 온누리약국과 손잡은 뷰티 카테고리 진출은 상품 판매보다 고객의 신뢰와 경험을 먼저 쌓는다는 오랜 방식이 패션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취미로 시작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20여 년 만에 유가증권시장의 최대 패션 플랫폼 기업 공개로 이어지고 있다. 무신사의 기업 가치는 8조~10조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삼성과 SK 총수들 사이에서 직접 쇼핑백을 챙겨 존재감을 남겼던 그 디테일이, 조 대표가 지금 회사 안에서 공식 직책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디테일'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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