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고인원 기자= 글로벌 채권시장의 매도세가 1일(현지 시각) 더욱 거세졌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장중 5.34%까지 치솟아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영국 30년물 금리는 6%를 돌파했다.
중동 분쟁에 따른 고유가가 인플레이션 우려를 다시 자극하면서 주요국의 추가 금리 인상 전망이 강해진 데다 미국과 유럽의 재정 불안까지 겹쳤다. 여기에 헤지펀드와 기관투자자들의 손절매성 채권 매도가 쏟아지면서 '금리 상승→채권 매도→추가 금리 상승'의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이날 장중 4bp(1bp=0.01%포인트) 오른 5.34%까지 치솟았다. 약 2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후 상승 폭을 반납해 5.29% 수준으로 내려왔다.
◆ 고유가·재정 불안에 美 10년물 5.34%…"매도가 매도 부르는 악순환"
시장에서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32조달러 규모의 미 국채시장이 '매도가 매도를 부르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경고가 나왔다.
최근 글로벌 국채 금리를 밀어 올린 첫 번째 요인은 국제유가다. 이란 전쟁에 따른 공급 차질 우려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브렌트유는 이날 2.0% 오른 배럴당 99.99달러를 기록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를 다시 끌어올리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예상보다 더 많이 올리거나 높은 금리를 장기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우려가 채권 가격을 끌어내리고 금리를 밀어 올리고 있다. 유가와 미 국채 금리의 상관관계는 199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견조한 미국 경제지표까지 겹쳤다. 경기 둔화 없이 물가 압력이 이어질 경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추가 긴축에 나설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물가지표가 시장 예상을 웃돌면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실제 물가 압력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연준이 선호하는 물가지표가 둔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국의 재정 문제도 국채 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금리가 이미 높은 상황에서 정부의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부담이 커지면 투자자들은 장기 국채를 보유하는 대가로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 일본의 재정 우려까지 동시에 부각되면서 각국 국채 금리가 서로 영향을 주며 상승하는 양상이다.
취리히의 가이 밀러 수석 시장전략가는 "금리가 오르면서 서로를 함께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기술적인 매도까지 가세하면서 금리 상승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헤지펀드와 대형 기관투자자들이 금리 상승에 따른 포트폴리오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장기채를 처분하거나 손실이 커진 거래를 청산하면서 채권 가격이 더 떨어지고 금리가 다시 오르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RBC 블루베이 자산운용의 마이크 벨 시장전략 책임자는 "투자자들이 떨어지는 칼날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있다"며 "기술적 요인에 따른 매도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투자자가 롱 포지션에서 손절매를 당하거나 '금리가 계속 오르는데 더 이상 갖고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했다.
◆ 英 30년물 6% 돌파…프랑스도 25년 만의 최고
미국발 채권시장 충격은 유럽으로 빠르게 번졌다. 특히 영국 국채시장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LSEG에 따르면 영국 30년물 국채 금리는 이날 장중 6.029%까지 올라 1998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날보다 6bp 오른 수준이다. 10년물 금리도 8bp 상승한 5.510%로 2007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5년물 금리 역시 2008년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뛰었다.
영국 국채 금리가 다른 유럽 국가보다 더 크게 오른 데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취약한 경제 구조와 재정 불안이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가정 난방과 발전에서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아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와 가계 부담으로 빠르게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동 분쟁이 시작된 이후 영국 정부의 차입 비용은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보다 가파르게 상승했다.
여기에 이달 말 존 힐리 재무장관의 첫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재정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국채 금리가 오르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늘어나고 그만큼 재정 운용 여력은 줄어든다. 이번 예산안에는 세금 인상 조치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에서는 이에 따라 영란은행(BOE)의 추가 금리 인상 전망도 강화되고 있다. 투자자들은 영란은행이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오는 11월이나 12월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2월 추가 인상 가능성도 시장 가격에 반영돼 있다.
다만 고물가와 가계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는 점은 영란은행의 고민이다.
라보뱅크의 제인 폴리 G10 외환전략 책임자는 "시장은 상당히 많은 금리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면서도 "영란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가계는 앞으로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 상승의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도 재정 우려가 국채시장을 흔들었다. 프랑스 10년물 국채 금리는 장중 최대 10bp 오른 4.96%까지 치솟아 약 25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4.81% 수준까지 내려왔다. 어려운 예산 협상을 앞두고 정부의 재정 여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장중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다.
◆ 日 국채까지 동반 약세…회사채로 번지는 불안
채권시장 불안은 아시아로도 번졌다. 일본 국채 금리는 4bp 오른 3.1%로 수십 년 만의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바클레이스의 미툴 코테차 아시아 외환·신흥시장 거시전략 책임자는 일본 국채 약세에 대해 "미국 시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전염 효과와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합된 결과"라며 "재정에 대한 우려가 계속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다음 우려는 국채시장 충격이 회사채로 번지는 것이다. 국채 금리는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여기에 투자자들이 회사채에 요구하는 위험 프리미엄까지 높아지면 기업들의 실제 차입 비용은 더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
이미 이런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ICE BofA에 따르면 유럽 투자등급 회사채의 국채 대비 가산금리는 이번 주 약 0.9%포인트까지 올라 지난 4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본토벨 자산운용의 앤드루 잭슨 투자 책임자는 "신용 스프레드가 국채 금리를 따라 더 높아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 변동성도 커지고 있다. 미 국채시장의 내재 변동성을 나타내는 ICE BofA MOVE 지수는 중동 분쟁 초기 기록했던 고점에 근접했다.
◆ 채권 투매에도 美 증시는 버텨…AI 실적 기대가 방어막
결국 현재 글로벌 채권시장은 '유가 상승→인플레이션 우려→추가 금리 인상 전망→국채 매도'라는 흐름에 주요국의 재정 불안과 투자자들의 포지션 청산이 겹치면서 금리 상승이 증폭되는 구조다.
채권시장 충격에 유럽 증시는 약세를 보였다. 범유럽 스톡스유럽600지수는 각각 0.3%, 영국 FTSE100지수는 0.6% 하락하고 있다.
반면 미 증시는 상대적으로 견조했다. 뉴욕 증시 개장을 앞두고 S&P500지수 선물은 0.4%, 나스닥100지수 선물은 0.6% 가량 상승했다. 국채 금리 급등에도 인공지능(AI) 관련 기업들의 실적 기대가 투자 심리를 떠받쳤다.
아비바 인베스터스의 해리엇 발라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AI 관련 업종은 강한 실적 덕분에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의 충격에서 잘 보호받아 왔다"고 말했다.
koinwo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