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고인원 기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 상장주식을 블록체인 기반 토큰으로 만들어 거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암호화폐 규제의 핵심 법안인 '클래리티법(Clarity Act)'이 미 상원 문턱을 넘지 못한 지 불과 이틀 만이다.
SEC는 17일(현지시간)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거래 플랫폼과 유동성 공급자가 미국 상장주식을 토큰화해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 명령을 발표했다. 조치는 즉시 발효된다.
혁신 면제는 거래 플랫폼 등이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기존 증권 규제의 일부를 면제받아 토큰화 주식 거래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SEC는 대신 투자자와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 조건을 달았다. 주식 토큰 보유자는 실제 주식을 보유했을 때와 동일하게 배당을 받고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상장기업에는 자사 주식의 토큰화를 거부할 권리를 부여했다. 거래 플랫폼은 기업에 주식 토큰화 계획을 사전에 통보해야 하며, 기업이 통보를 받은 뒤 30일 동안 거래를 시작할 수 없다. 이 기간 기업이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주식 토큰을 거래할 수 없다.
◆ 클래리티법 좌초 이틀 만에 SEC가 직접 나섰다
이번 조치는 암호화폐 업계가 규제 명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해온 핵심 시장구조 법안인 클래리티법이 상원에서 절차표결을 통과하지 못한 지 이틀 만에 나왔다.
클래리티법은 토큰화 증권을 포함한 디지털 자산을 어떻게 분류하고 규제할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법안 처리가 막힌 가운데 SEC가 기존 권한을 활용해 토큰화 증권의 규제 경계를 직접 설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은 "혁신 면제는 미국에서 책임 있는 혁신이 뿌리내리는 것을 막아온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투자자 보호와 시장 건전성 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됐다"고 밝혔다.
이번 면제는 5년간 적용된다. 정식 규칙 제정은 아니지만 SEC는 이 기간 실제 시장에서 토큰화 거래를 허용하면서 얻은 데이터를 향후 최종 규칙 마련에 활용할 방침이다. 의회가 추가 입법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데도 참고할 수 있다.
이번 조치는 미국 금융시장을 블록체인 위로 옮기려는 SEC의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의 일환이다.
앳킨스 위원장은 "위원회는 오늘날의 기술을 미래의 표준으로 굳히려는 것이 아니다"며 "시장이 진화하도록 허용하고 그 발전 과정을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을 보다 민첩하고 미래에 대비한 규제 체계를 만드는 데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美 주식도 '24시간 거래' 가능해지나
토큰화는 상장주식이나 실물자산 등 현실 세계의 자산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거래할 수 있는 디지털 형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토큰화가 확산되면 미국 주식의 거래와 결제 방식에도 큰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기존 증권거래소의 정규 거래시간에서 벗어나 암호화폐처럼 하루 24시간, 주 7일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 등 전통 금융자산을 블록체인 기반 금융 인프라와 직접 연결하기도 쉬워진다.
코인베이스(COIN)와 로빈후드(HOOD), 제미니(GEMI), 크라켄 등 주요 암호화폐·핀테크 업체들은 이미 미국 이외 지역에서 토큰화 주식 상품을 출시했지만 미국 고객에게는 아직 제공하지 않고 있다.
SEC의 이번 조치로 이들 업체가 미국에서도 토큰화 주식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는 규제 경로가 마련된 셈이다.
다만 거래가 뜸한 시간대에는 유동성 부족으로 가격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SEC는 이런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혁신 면제에 거래량 제한을 포함했다.
◆ 배당·의결권 보장…기업에는 '거부권'
주식 토큰 시장을 둘러싼 핵심 논란은 토큰을 보유한 투자자가 실제 주주와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최근 블라드 테네브 로빈후드 최고경영자(CEO)와 애덤 애런 AMC CEO가 로빈후드의 주식 토큰 모델을 놓고 공개적으로 충돌하면서 부각됐다.
애런 CEO는 발행 기업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기업 주식에 대한 익스포저를 제공하는 토큰을 만들 경우 기업과 주주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EC는 이번 혁신 면제를 통해 주식 토큰이 기존 주식과 동일한 권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토큰 보유자에게 배당받을 권리는 물론 의결권도 부여해야 한다.
기업도 자사 주식의 토큰화를 막을 수 있다. 거래 플랫폼이 토큰화 계획을 통보한 뒤 30일 이내에 기업이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플랫폼은 주식 토큰을 거래할 수 없다.
로빈후드도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해 주식 토큰 구조를 손질하고 있다. 회사는 토큰 보유자가 토큰을 실제 기초 주식과 1대1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하고 의결권도 부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EC가 5년간의 '혁신 면제'를 통해 시장의 실험을 허용하면서 미국에서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토큰화 주식과 24시간 주식 거래가 본격적으로 확대될지 주목된다.
koinwon@newspim.com
